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가는 독립서점이 있습니다. 집에서 그 서점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재개발이 확정되고 퇴거 중인 동네가 있습니다. 집들은 대개 오래된 이삼 층짜리 연립주택입니다. 퇴거가 완료된 구역에는 공사용 장막이 드리워집니다. 몇 달에 한 번씩 그 동네를 지나갈 때마다 장막이 드리워진 영역이 넓어졌습니다. 장막이 집들만 가리지는 않습니다. 만약 인접한 여러 구역에서 퇴거가 완료된다면, 아무래도 시공하는 입장에서는 그 지역을 걸어다닐 '비 관계자'는 없는 쪽이 편합니다. 그래서 공사용 장막은 집과 함께 길을 가려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서점을 찾아갔을 때는 빈 집들 사이를 지나가는 가장 빠른 길 몇 개가 모두 막혀 있었습니다. 그 동네는 지대가 좀 높습니다. 그래서 키보다 훨씬 높이까지 쳐져 있는 장막 너머로는 보통 하늘이 보이는데, 그 한켠에는 앞서 재개발이 끝난 대단위 아파트 단지의 상층부가 보였습니다. 이 동네도 저렇게 변하겠구나, 곧 여기 남아있는 흔적들이 사라지고...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게 맞을까. 이 길 위에 장막이 드리워지던 순간, 마술사가 코끼리를 사라지게 하듯이, 이미 이 길에 면한 집들과 동네는 사라짐을 끝낸 게 아닐까 하고요.
들어가서 볼 수도, 그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줄 이도 남아있지 않은 세계는 아직 실존하고 있더라도 이미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이미 사라졌더라도 여전히 '보여지는' 것들은 사라진 게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기록한다는 일은 세상 만물이 필멸한다는 법칙에 저항하려는 시도겠지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사진을 찍는 일은 모두 죽음-소멸을 지연시킵니다. 금기에 도전하는 멜랑콜리입니다. 특히 사진은 '기록'에 최적화한, 또는 그렇게 받아들여진 매체였기 때문에, 언제나 많은 사진가들이 쇠락한 곳들로 향했습니다.
사실상 재개발-폐허 사진은 일종의 서브 장르입니다. 꾸준히 인기가 있고 생산량도 풍부한 편입니다. 언제나 누군가가 버려진 장소를 찍고 있으며, 그중 어떤 이미지는 애도와 추억 속에서 공유되고, 훨씬 많은 이미지들은 그대로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이미지로서 살아남은(혹은 유효한) 것들과, 이미지로서도 다시금 잊혀지는 것들 사이에는 아주 깊고 넓은 간격이 있습니다.
이번 보스토크는 '사라지는 나의 도시'에 대해 말합니다. '사라지는 도시'가 아니라 '사라지는 나의 도시'입니다. 여기에 기록 혹은 재수록된 이미지와 서사들은 어제 잊혀진 것들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사라지는 도시'는 이 잡지가 아니라 그 바깥에서 비로소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대신 보스토크는 사라짐에 대해서 증언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수집했습니다. 소멸해가는 세상 만물 가운데 내가 특별히 애도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지요. 이는 곧 내가 좋아하는(좋아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번 호는 보스토크의 지난호와 지지난호에 이은 사랑 이야기인 셈입니다.
보스토크는 스타일이 다른 두 사진가 최용준과 이강혁에게 똑같이 을지로를 촬영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물인 '을지로의 낮, 을지로의 밤, 2019'는 같은 지역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두 사진가의 이미지들이 강렬하게 대응하는 일종의 콘트라스트를 보여줍니다. 반면에 같은 지역의 재개발에 주목하는 윤성희와 임병식의 글과 사진은, 멈추기 어려운 강물처럼 완강하게 흘러갑니다. 장혜령과 박성진의 '청량리'는 사진과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장르를 특정하기 어려운 장혜령의 글은 박성진의 사진 혹은 청량리의 쇠락한 구역이 안고 있는 심적인 힘, 즉 강렬한 기억-역사가 해소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유령-노스탤지어를 소설처럼 그려내 보입니다.
쭉 이어서 만나는 주용성, 박찬배, 김신욱, 마누엘 알바레즈 디에스토로의 사진들은 '재개발 스펙터클 이미지'에 접근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연이어 제시합니다. 김시덕의 글은 기억됨으로써 살아남는 것과 그렇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들 사이의 간격을 '경기도 성남시'를 통해 보여줍니다. 그러고 나면 두 편의 회고가 이어집니다. 목동이라는 지역에 대해 쓴 은유의 에세이와, 어릴 때 살았던 좁고 작은 아파트에 대한 백세희의 에세이입니다. 지역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축적의 정도가 다른 두 회고를 이어 읽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흐름이 조금씩 바뀝니다. 김신식의 '디스로케이션'은 실재하는 도시를 데이터-패턴으로 해체하고(이 '디스로케이션' 과정에서 그 도시의 '스케이프'는 사라질 것입니다) 재구성함으로써 무언가를 기억하는 또다른 방식을 제시합니다. 최원호의 책 소개는 사라졌던 사람들, 즉 정상인의 세계 바깥으로 떠밀렸거나 스스로 거기 다녀온 이들이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따라가 봅니다.
이어지는 플로리안 봉길 그로세와 홍진훤의 사진들은 조금 더 사물에 가까이 다가서면서 조금 더 시처럼 보입니다. 이제는 폐장한 알프스 리조트의 과거와 현재의 사진들을 병치한 김천수의 'Alps', 어떤 지역이 그곳에 속한 사람의 몸과 건물의 형태에 남긴 일관적인 힘을 포착하는 오석근의 'Chug', 분단의 정치적 현실이 종용한 폐허를 꾸준히 기록 중인 이재각의 '여섯 번의 밤, 사라진 말들'은 사라지는 것들을 어떻게 담을 수 있는지, 또한 어떻게 담을 것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한편, 보스토크의 꾸준한 자랑거리인 연재 코너는 이번에도 기쁜 마음으로 소개할 수 있습니다. 유운성과 윤원화의 칼럼은 언제나처럼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고토 유미의 사진 워크샵이 남긴 인상적인 수제 사진책이 지닌 의미와 사진적 실천을 곱씹어보는 시간도 각별합니다. 마지막으로는 docking!2018 파이널리스트에 진출한 사진가 이유주의 강렬한 사진 이미지와 인터뷰로 이번호의 여정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VOSTOK〉 VOL.14
특집 | 사라지는 나의 도시
Marker _ 다니엘 에버렛(Daniel Everett)
43-35 10th Street _ 다니엘 시어(Daniel Shea)
한 시절 또는 한 세상이 지워져 간다고 했다 _ 윤성희, 임병식
을지로의 낮, 을지로의 밤, 2019 _ 최용준, 이강혁
청량리 _ 장혜령, 박성진
옥수동 13구역 _ 주용성
원 와일드 나이트 _ 박찬배
파라다이스 _ 김신욱
Metropolitan Area _ 마누엘 알바레즈 디에스트로(Manuel Alvarez iestro)
성남, 세 도시 이야기 _ 김시덕
나의 살던 고향 목동을 기억하며 _ 은유
카스테라 모양을 한 나의 가난 _ 백세희
디스로케이션 _ 김신식
대관람차와 대화하는 법 _ 최원호
Hanguk _ 플로리안 봉길 그로세(Florian Bongkil Grosse)
워터폴 _ 홍진훤
아파트 글자와 서울의 목욕탕 _ 박지수
알프스 _ 김천수
축 _ 오석근
여섯 번의 밤, 사라진 말들 _ 이재각
[스톱-모션] 그저 하나의 얼굴 _ 유운성
[사진 같은 것의 기술] 언메이크랩, 색채 없는 시각 _ 윤원화
[사진집 아나토미] 고토 유미의 워크샵과 손으로 만든 사진책 _ 송수정, 김현호
[전시 셔틀] 《Walking, Jumping, Speaking, Writing.》_ 이기원
[도킹! 2018] 나를 그냥 보여주면 되잖아요? 이유주 인터뷰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가는 독립서점이 있습니다. 집에서 그 서점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재개발이 확정되고 퇴거 중인 동네가 있습니다. 집들은 대개 오래된 이삼 층짜리 연립주택입니다. 퇴거가 완료된 구역에는 공사용 장막이 드리워집니다. 몇 달에 한 번씩 그 동네를 지나갈 때마다 장막이 드리워진 영역이 넓어졌습니다. 장막이 집들만 가리지는 않습니다. 만약 인접한 여러 구역에서 퇴거가 완료된다면, 아무래도 시공하는 입장에서는 그 지역을 걸어다닐 '비 관계자'는 없는 쪽이 편합니다. 그래서 공사용 장막은 집과 함께 길을 가려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서점을 찾아갔을 때는 빈 집들 사이를 지나가는 가장 빠른 길 몇 개가 모두 막혀 있었습니다. 그 동네는 지대가 좀 높습니다. 그래서 키보다 훨씬 높이까지 쳐져 있는 장막 너머로는 보통 하늘이 보이는데, 그 한켠에는 앞서 재개발이 끝난 대단위 아파트 단지의 상층부가 보였습니다. 이 동네도 저렇게 변하겠구나, 곧 여기 남아있는 흔적들이 사라지고...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게 맞을까. 이 길 위에 장막이 드리워지던 순간, 마술사가 코끼리를 사라지게 하듯이, 이미 이 길에 면한 집들과 동네는 사라짐을 끝낸 게 아닐까 하고요.
들어가서 볼 수도, 그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줄 이도 남아있지 않은 세계는 아직 실존하고 있더라도 이미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이미 사라졌더라도 여전히 '보여지는' 것들은 사라진 게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기록한다는 일은 세상 만물이 필멸한다는 법칙에 저항하려는 시도겠지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사진을 찍는 일은 모두 죽음-소멸을 지연시킵니다. 금기에 도전하는 멜랑콜리입니다. 특히 사진은 '기록'에 최적화한, 또는 그렇게 받아들여진 매체였기 때문에, 언제나 많은 사진가들이 쇠락한 곳들로 향했습니다.
사실상 재개발-폐허 사진은 일종의 서브 장르입니다. 꾸준히 인기가 있고 생산량도 풍부한 편입니다. 언제나 누군가가 버려진 장소를 찍고 있으며, 그중 어떤 이미지는 애도와 추억 속에서 공유되고, 훨씬 많은 이미지들은 그대로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이미지로서 살아남은(혹은 유효한) 것들과, 이미지로서도 다시금 잊혀지는 것들 사이에는 아주 깊고 넓은 간격이 있습니다.
이번 보스토크는 '사라지는 나의 도시'에 대해 말합니다. '사라지는 도시'가 아니라 '사라지는 나의 도시'입니다. 여기에 기록 혹은 재수록된 이미지와 서사들은 어제 잊혀진 것들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사라지는 도시'는 이 잡지가 아니라 그 바깥에서 비로소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대신 보스토크는 사라짐에 대해서 증언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수집했습니다. 소멸해가는 세상 만물 가운데 내가 특별히 애도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지요. 이는 곧 내가 좋아하는(좋아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번 호는 보스토크의 지난호와 지지난호에 이은 사랑 이야기인 셈입니다.
보스토크는 스타일이 다른 두 사진가 최용준과 이강혁에게 똑같이 을지로를 촬영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물인 '을지로의 낮, 을지로의 밤, 2019'는 같은 지역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두 사진가의 이미지들이 강렬하게 대응하는 일종의 콘트라스트를 보여줍니다. 반면에 같은 지역의 재개발에 주목하는 윤성희와 임병식의 글과 사진은, 멈추기 어려운 강물처럼 완강하게 흘러갑니다. 장혜령과 박성진의 '청량리'는 사진과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장르를 특정하기 어려운 장혜령의 글은 박성진의 사진 혹은 청량리의 쇠락한 구역이 안고 있는 심적인 힘, 즉 강렬한 기억-역사가 해소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유령-노스탤지어를 소설처럼 그려내 보입니다.
쭉 이어서 만나는 주용성, 박찬배, 김신욱, 마누엘 알바레즈 디에스토로의 사진들은 '재개발 스펙터클 이미지'에 접근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연이어 제시합니다. 김시덕의 글은 기억됨으로써 살아남는 것과 그렇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들 사이의 간격을 '경기도 성남시'를 통해 보여줍니다. 그러고 나면 두 편의 회고가 이어집니다. 목동이라는 지역에 대해 쓴 은유의 에세이와, 어릴 때 살았던 좁고 작은 아파트에 대한 백세희의 에세이입니다. 지역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축적의 정도가 다른 두 회고를 이어 읽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흐름이 조금씩 바뀝니다. 김신식의 '디스로케이션'은 실재하는 도시를 데이터-패턴으로 해체하고(이 '디스로케이션' 과정에서 그 도시의 '스케이프'는 사라질 것입니다) 재구성함으로써 무언가를 기억하는 또다른 방식을 제시합니다. 최원호의 책 소개는 사라졌던 사람들, 즉 정상인의 세계 바깥으로 떠밀렸거나 스스로 거기 다녀온 이들이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따라가 봅니다.
이어지는 플로리안 봉길 그로세와 홍진훤의 사진들은 조금 더 사물에 가까이 다가서면서 조금 더 시처럼 보입니다. 이제는 폐장한 알프스 리조트의 과거와 현재의 사진들을 병치한 김천수의 'Alps', 어떤 지역이 그곳에 속한 사람의 몸과 건물의 형태에 남긴 일관적인 힘을 포착하는 오석근의 'Chug', 분단의 정치적 현실이 종용한 폐허를 꾸준히 기록 중인 이재각의 '여섯 번의 밤, 사라진 말들'은 사라지는 것들을 어떻게 담을 수 있는지, 또한 어떻게 담을 것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한편, 보스토크의 꾸준한 자랑거리인 연재 코너는 이번에도 기쁜 마음으로 소개할 수 있습니다. 유운성과 윤원화의 칼럼은 언제나처럼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고토 유미의 사진 워크샵이 남긴 인상적인 수제 사진책이 지닌 의미와 사진적 실천을 곱씹어보는 시간도 각별합니다. 마지막으로는 docking!2018 파이널리스트에 진출한 사진가 이유주의 강렬한 사진 이미지와 인터뷰로 이번호의 여정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VOSTOK〉 VOL.14
특집 | 사라지는 나의 도시
Marker _ 다니엘 에버렛(Daniel Everett)
43-35 10th Street _ 다니엘 시어(Daniel Shea)
한 시절 또는 한 세상이 지워져 간다고 했다 _ 윤성희, 임병식
을지로의 낮, 을지로의 밤, 2019 _ 최용준, 이강혁
청량리 _ 장혜령, 박성진
옥수동 13구역 _ 주용성
원 와일드 나이트 _ 박찬배
파라다이스 _ 김신욱
Metropolitan Area _ 마누엘 알바레즈 디에스트로(Manuel Alvarez iestro)
성남, 세 도시 이야기 _ 김시덕
나의 살던 고향 목동을 기억하며 _ 은유
카스테라 모양을 한 나의 가난 _ 백세희
디스로케이션 _ 김신식
대관람차와 대화하는 법 _ 최원호
Hanguk _ 플로리안 봉길 그로세(Florian Bongkil Grosse)
워터폴 _ 홍진훤
아파트 글자와 서울의 목욕탕 _ 박지수
알프스 _ 김천수
축 _ 오석근
여섯 번의 밤, 사라진 말들 _ 이재각
[스톱-모션] 그저 하나의 얼굴 _ 유운성
[사진 같은 것의 기술] 언메이크랩, 색채 없는 시각 _ 윤원화
[사진집 아나토미] 고토 유미의 워크샵과 손으로 만든 사진책 _ 송수정, 김현호
[전시 셔틀] 《Walking, Jumping, Speaking, Writing.》_ 이기원
[도킹! 2018] 나를 그냥 보여주면 되잖아요? 이유주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