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사진을 보면, 세상이 형태를 지닐 수 있는 이유가 누군가 그것을 관찰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길을 내기 위해 세상을 침범하거나 파괴하려고 욕망할 때가 아닌, 세상을 깊이있게 바라보고자 할 때 이미지는 형태를 취한다.”
—잔니 첼라티(Gianni Celati), 「루이지의 사진과 우정을 추억하며」 중에서.
한국인들에겐 아직 낯선 이름, 루이지 기리(Luigi Ghirri, 1943-1992).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현대사진가인 그는, 작년 파리 죄드폼 국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까지 열린 세계적인 작가다. 그러나 그의 사진 속 소재들을 보면 전통적인 이탈리아의 풍경에서부터 건축물, 일상 속 사물들, 하늘, 광고판 등 아주 평범한 것들이다. 이 작고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이 우리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피사체와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이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 아닐까. 기리는 마흔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뜰 때까지 카메라를 ‘통해서’ 세계를 다르게 보고자 했다. 그에게 사진은 사물에 어떤 존엄성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러한 태도로부터 사진 수업은 시작된다.
이 책은 루이지 기리가 1989-1990년 이탈리아의 프로제토대학교에서 진행한 수업을 훗날 글로 풀어 기록한 것으로,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사진의 역사, 빛과 조명, 렌즈, 프레이밍까지 근본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요소들이 그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담겨 있다. 기리는 이러한 내용의 깊이나 주제의 다양성을 특유의 간결하고 일상적인 화법을 통해 풀어놓는데, 그 덕분에 전공자뿐 아니라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초심자나 일반 독자들도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한국에 소개되는 루이지 기리의 첫 책인 만큼,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디딤돌이 되어 주리라 기대한다.
정의가 필요 없는,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
책의 전반부는 사진 찍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주제 선택 등 개념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루이지 기리는 사진 학교나 에이전시, 사진기자 등 이탈리아 사진계를 구성하는 전형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은 사진가이다. 그의 사진 경험은 이미지에 대한 관심과 ‘아마추어적인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흥미를 끄는 건 언제나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었는데,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대상, 즉 출근길 거리에서 마주치는 것들이나 책이나 지도, 버려진 신문,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 등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자신의 관심 분야를 넓혀 가고, 끊임없이 정신과 시선을 자유롭고 활발히 해야 한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각자의 분야를 선별하고 활성화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사진가의 역할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리는 오늘날의 사진가상이 “커뮤니케이션 이미지의 포괄적인 창작 안에서” 다채롭고 활발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진 철학은 수업 전체를 끌고 가는데, 초반에 특히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사진을 영화, 광고, 회화, 건축 등과 같은 다른 예술 언어의 상호작용 속에서 바라보라는 것이다. 창작자 혹은 제작자는 창조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타 예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한 언어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메커니즘을 시도해야 함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작업을 예로 든다. 프랑코 구에르조니나 알도 로시와 같은 예술가들과의 작업으로, 이 책에도 수록되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그밖에도 기리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화가 조르조 모란디의 스튜디오 작업에서 ‘회화적인’ 사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 루이지 기리에게 사진은 ‘어떤 정의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새로운 이미지였으며, 도상학적 전통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방식으로 가능성을 탐색해 나갔다. 이를 염두에 두고 수업을 따라가다 보면 기리가 이야기한 대로 각자의 “내면과 외부세계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의 원리, 사진의 역사
사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촬영에 필요한 기본 요소들을 체득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카메라’는 단순한 촬영 도구가 아닌, 촬영 전체를 좌우하는 기술과 연관된다. 기리가 이 수업에서 카메라나 렌즈의 사이즈, 종류 등을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카메라에 의해 현실과 맺는 관계 또한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렌즈를 교체할 수 없는 카메라라면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고정된다. 반면에 렌즈 교체가 가능한 카메라를 사용하면 시야 범위를 변경할 수 있고, 현실을 넓거나 좁게, 다른 방식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에게 사진술은 “이미지 안에서 강조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방법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카메라와 촬영의 기본 규칙 등을 이해함으로써 초보자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고 실전 대응력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기리는 촬영 장비를 완벽히 구비하기보다는 소박한 장치를 활용하길 권하는데, 촬영자가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자유롭게 접근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조리개도 없는 소형 카메라로 사진을 배운 사진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이다.
카메라에 대한 설명에 이어 책의 중후반부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 첫째는 사진의 역사로, 그는 이 새롭고 매혹적인 장르에 대해 “모든 예술과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아우르는 거대한 프레스코화 안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며, 사진이 다른 예술 또는 사회 운동과 함께해 온 역사적 흐름과 관계를 짚어 나간다. 더불어 사진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니엡스, 다게르, 탤벗, 뤼미에르 형제 등의 역사적 인물들과 다양한 카메라 옵스쿠라의 형태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여기서 말하는 사진의 역사란, “사진의 사회사도 새로운 예술사도 아닌, 형식과 내용에 대한 고정된 논리를 넘어 사진의 발견이 우리 삶에 가져온 모든 가능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강의실에서 광장으로
둘째는 입구와 투명성에 관한 주제로, 이는 심도나 프레이밍, 색채, 피사체에 접근하는 방법 등 구체적인 사진술과 작업 방식으로 세분된다. ‘입구’라는 말은 안과 바깥 사이의 통행로일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 보는 것, 볼 수 있는 것, 봐야 하는 것, 그리고 현실에서 관찰되는 것과의 경계를 뜻하기도 한다. 기리는 입구를 내면과 외부세계와의 경계를 가리키는 은유적인 의미로 정의하며, 프레임이나 촬영지 등을 실습하며 그 균형 감각을 익히도록 권한다. 무엇을 제외시키고 포함할지를 판단하는 연습을 해 보는 것이다.
한편 사진의 투명성이란, 단순한 시각적 투과를 넘어 촬영자가 대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젖빛유리판과 같으며 촬영하는 사람은 이 투명성을 주제로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투명 스크린을 여러 장 겹쳐 이미지를 중첩시키면, 시차를 두고 같은 피사체의 과거와 현재를 촬영한 결과물을 만들 수도 있다. 기리는 수업을 통해 촬영자와 외부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투명성을 모두 걷어내, 현실의 이면을 보는 데 목표를 둔다. 기리의 말을 빌리자면 “사진가는 빛과 투명성을 통해” 사진을 구성한다. 책에는 수업 때 학생들이 실습한 작품들도 일부 수록돼 있어 이론이 어떻게 실습에 적용되었는지 좀 더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시선과 음악의 공통점
마지막 장에서는 클래식, 록, 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음반 디자인을 다룬다. 사진 수업에서 음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의아할 수 있지만, 기리는 그래픽 디자인이나 소재, 케이스 형태 등 음반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이미지를 살펴본다. 세계적인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이나 당시에 성행했던 해적판,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엘피(LP) 레코드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이탈리아의 민속음악 시리즈, 이탈리아 가수들의 앨범 제작 에피소드 등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이야깃거리를 풀어놓는다.
당시 기리는 시시시피(CCCP)라는 이탈리아의 록 밴드 앨범 커버를 위한 사진 촬영과 기획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음악에 열정적이었는데, 특히 밥 딜런의 팬으로 모든 유럽 투어 콘서트를 관람했을 정도였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 「루이지의 사진과 우정을 추억하며」에서 잔니 첼라티가 회고하기를, 기리는 사진 촬영을 다니며 늘 음악을 들었고 시선과 음악의 공통점에 대해 “양쪽 모두 한계를 넘어서려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라 이야기했다. 기리는 한계를 뛰어넘은 음반사의 혁신적인 시도 중 한 사례로 비틀스의 『서전트 페퍼(Sgt. Pepper)』를 꼽으며 비틀스를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최초의 그룹이라 설명한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화보집을 수록하거나 ‘듣는’ 음악인 음반에서 ‘보는’ 음악인 비디오영상으로의 이행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밖에 롤링 스톤스, 핑크 플로이드, 브라이언 이노 등 다양한 뮤지션들이 언급된다.
지나온 음반의 역사를 되짚는 데서 나아가 당시 변화의 기로에 있던 음악과 이미지의 관계 역시 진단한다. 가수들의 음악이 아닌 얼굴이 앨범의 중심 요소로 자리잡으면서 음반 제작이 제한적이고 일괄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있던 것이다. 기리는 그래픽 디자인뿐 아니라 음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앨범 구성, 가사와 해설 등의 텍스트, 로고, 앨범 제목 등 총체적인 기획 차원에서 이야기한다. 이는 그간의 수업에서 강조해 온 스토리텔링, 그리고 소통의 메커니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휴대폰으로 초고화질의 디지털 이미지를 찍을 수 있는 지금, 독자들은 삼십여 년 전 필름 카메라 세대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들지 모르겠다. 전문 카메라를 구입하더라도 간편한 자동 모드를 이용하면 충분히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루이지 기리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중요한 건 대단한 장소나 좋은 조건이 아니라 평범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라는 아주 당연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그의 사진과 이야기의 매력은 가까운 주변을 둘러보고 관찰하도록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카메라를 손에 들고 싶어지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가 카메라의 젖빛유리판 너머로 현실의 이면을 발견했듯이, 독자들은 평범하고 단순해 보이는 그의 사진들과 이야기를 통해 그 속에 존재하는 중요한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업에서 다루지 못한 정보들은 엮은이의 자세한 주석으로, 한국 독자에게 생소한 이탈리아 관련 정보들은 옮긴이 주로 보완했다. 루이지 기리의 대표작과 관련한 시각자료도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고, 책끝에는 작가 잔니 첼라티가 기록한 루이기 기리를 향한 우정 어린 회고가 있어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사진을 보면, 세상이 형태를 지닐 수 있는 이유가 누군가 그것을 관찰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길을 내기 위해 세상을 침범하거나 파괴하려고 욕망할 때가 아닌, 세상을 깊이있게 바라보고자 할 때 이미지는 형태를 취한다.”
—잔니 첼라티(Gianni Celati), 「루이지의 사진과 우정을 추억하며」 중에서.
한국인들에겐 아직 낯선 이름, 루이지 기리(Luigi Ghirri, 1943-1992).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현대사진가인 그는, 작년 파리 죄드폼 국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까지 열린 세계적인 작가다. 그러나 그의 사진 속 소재들을 보면 전통적인 이탈리아의 풍경에서부터 건축물, 일상 속 사물들, 하늘, 광고판 등 아주 평범한 것들이다. 이 작고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이 우리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피사체와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이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 아닐까. 기리는 마흔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뜰 때까지 카메라를 ‘통해서’ 세계를 다르게 보고자 했다. 그에게 사진은 사물에 어떤 존엄성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러한 태도로부터 사진 수업은 시작된다.
이 책은 루이지 기리가 1989-1990년 이탈리아의 프로제토대학교에서 진행한 수업을 훗날 글로 풀어 기록한 것으로,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사진의 역사, 빛과 조명, 렌즈, 프레이밍까지 근본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요소들이 그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담겨 있다. 기리는 이러한 내용의 깊이나 주제의 다양성을 특유의 간결하고 일상적인 화법을 통해 풀어놓는데, 그 덕분에 전공자뿐 아니라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초심자나 일반 독자들도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한국에 소개되는 루이지 기리의 첫 책인 만큼,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디딤돌이 되어 주리라 기대한다.
정의가 필요 없는,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
책의 전반부는 사진 찍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주제 선택 등 개념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루이지 기리는 사진 학교나 에이전시, 사진기자 등 이탈리아 사진계를 구성하는 전형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은 사진가이다. 그의 사진 경험은 이미지에 대한 관심과 ‘아마추어적인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흥미를 끄는 건 언제나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었는데,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대상, 즉 출근길 거리에서 마주치는 것들이나 책이나 지도, 버려진 신문,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 등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자신의 관심 분야를 넓혀 가고, 끊임없이 정신과 시선을 자유롭고 활발히 해야 한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각자의 분야를 선별하고 활성화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사진가의 역할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리는 오늘날의 사진가상이 “커뮤니케이션 이미지의 포괄적인 창작 안에서” 다채롭고 활발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진 철학은 수업 전체를 끌고 가는데, 초반에 특히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사진을 영화, 광고, 회화, 건축 등과 같은 다른 예술 언어의 상호작용 속에서 바라보라는 것이다. 창작자 혹은 제작자는 창조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타 예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한 언어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메커니즘을 시도해야 함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작업을 예로 든다. 프랑코 구에르조니나 알도 로시와 같은 예술가들과의 작업으로, 이 책에도 수록되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그밖에도 기리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화가 조르조 모란디의 스튜디오 작업에서 ‘회화적인’ 사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 루이지 기리에게 사진은 ‘어떤 정의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새로운 이미지였으며, 도상학적 전통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방식으로 가능성을 탐색해 나갔다. 이를 염두에 두고 수업을 따라가다 보면 기리가 이야기한 대로 각자의 “내면과 외부세계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의 원리, 사진의 역사
사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촬영에 필요한 기본 요소들을 체득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카메라’는 단순한 촬영 도구가 아닌, 촬영 전체를 좌우하는 기술과 연관된다. 기리가 이 수업에서 카메라나 렌즈의 사이즈, 종류 등을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카메라에 의해 현실과 맺는 관계 또한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렌즈를 교체할 수 없는 카메라라면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고정된다. 반면에 렌즈 교체가 가능한 카메라를 사용하면 시야 범위를 변경할 수 있고, 현실을 넓거나 좁게, 다른 방식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에게 사진술은 “이미지 안에서 강조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방법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카메라와 촬영의 기본 규칙 등을 이해함으로써 초보자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고 실전 대응력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기리는 촬영 장비를 완벽히 구비하기보다는 소박한 장치를 활용하길 권하는데, 촬영자가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자유롭게 접근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조리개도 없는 소형 카메라로 사진을 배운 사진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이다.
카메라에 대한 설명에 이어 책의 중후반부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 첫째는 사진의 역사로, 그는 이 새롭고 매혹적인 장르에 대해 “모든 예술과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아우르는 거대한 프레스코화 안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며, 사진이 다른 예술 또는 사회 운동과 함께해 온 역사적 흐름과 관계를 짚어 나간다. 더불어 사진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니엡스, 다게르, 탤벗, 뤼미에르 형제 등의 역사적 인물들과 다양한 카메라 옵스쿠라의 형태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여기서 말하는 사진의 역사란, “사진의 사회사도 새로운 예술사도 아닌, 형식과 내용에 대한 고정된 논리를 넘어 사진의 발견이 우리 삶에 가져온 모든 가능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강의실에서 광장으로
둘째는 입구와 투명성에 관한 주제로, 이는 심도나 프레이밍, 색채, 피사체에 접근하는 방법 등 구체적인 사진술과 작업 방식으로 세분된다. ‘입구’라는 말은 안과 바깥 사이의 통행로일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 보는 것, 볼 수 있는 것, 봐야 하는 것, 그리고 현실에서 관찰되는 것과의 경계를 뜻하기도 한다. 기리는 입구를 내면과 외부세계와의 경계를 가리키는 은유적인 의미로 정의하며, 프레임이나 촬영지 등을 실습하며 그 균형 감각을 익히도록 권한다. 무엇을 제외시키고 포함할지를 판단하는 연습을 해 보는 것이다.
한편 사진의 투명성이란, 단순한 시각적 투과를 넘어 촬영자가 대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젖빛유리판과 같으며 촬영하는 사람은 이 투명성을 주제로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투명 스크린을 여러 장 겹쳐 이미지를 중첩시키면, 시차를 두고 같은 피사체의 과거와 현재를 촬영한 결과물을 만들 수도 있다. 기리는 수업을 통해 촬영자와 외부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투명성을 모두 걷어내, 현실의 이면을 보는 데 목표를 둔다. 기리의 말을 빌리자면 “사진가는 빛과 투명성을 통해” 사진을 구성한다. 책에는 수업 때 학생들이 실습한 작품들도 일부 수록돼 있어 이론이 어떻게 실습에 적용되었는지 좀 더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시선과 음악의 공통점
마지막 장에서는 클래식, 록, 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음반 디자인을 다룬다. 사진 수업에서 음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의아할 수 있지만, 기리는 그래픽 디자인이나 소재, 케이스 형태 등 음반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이미지를 살펴본다. 세계적인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이나 당시에 성행했던 해적판,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엘피(LP) 레코드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이탈리아의 민속음악 시리즈, 이탈리아 가수들의 앨범 제작 에피소드 등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이야깃거리를 풀어놓는다.
당시 기리는 시시시피(CCCP)라는 이탈리아의 록 밴드 앨범 커버를 위한 사진 촬영과 기획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음악에 열정적이었는데, 특히 밥 딜런의 팬으로 모든 유럽 투어 콘서트를 관람했을 정도였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 「루이지의 사진과 우정을 추억하며」에서 잔니 첼라티가 회고하기를, 기리는 사진 촬영을 다니며 늘 음악을 들었고 시선과 음악의 공통점에 대해 “양쪽 모두 한계를 넘어서려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라 이야기했다. 기리는 한계를 뛰어넘은 음반사의 혁신적인 시도 중 한 사례로 비틀스의 『서전트 페퍼(Sgt. Pepper)』를 꼽으며 비틀스를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최초의 그룹이라 설명한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화보집을 수록하거나 ‘듣는’ 음악인 음반에서 ‘보는’ 음악인 비디오영상으로의 이행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밖에 롤링 스톤스, 핑크 플로이드, 브라이언 이노 등 다양한 뮤지션들이 언급된다.
지나온 음반의 역사를 되짚는 데서 나아가 당시 변화의 기로에 있던 음악과 이미지의 관계 역시 진단한다. 가수들의 음악이 아닌 얼굴이 앨범의 중심 요소로 자리잡으면서 음반 제작이 제한적이고 일괄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있던 것이다. 기리는 그래픽 디자인뿐 아니라 음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앨범 구성, 가사와 해설 등의 텍스트, 로고, 앨범 제목 등 총체적인 기획 차원에서 이야기한다. 이는 그간의 수업에서 강조해 온 스토리텔링, 그리고 소통의 메커니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휴대폰으로 초고화질의 디지털 이미지를 찍을 수 있는 지금, 독자들은 삼십여 년 전 필름 카메라 세대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들지 모르겠다. 전문 카메라를 구입하더라도 간편한 자동 모드를 이용하면 충분히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루이지 기리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중요한 건 대단한 장소나 좋은 조건이 아니라 평범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라는 아주 당연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그의 사진과 이야기의 매력은 가까운 주변을 둘러보고 관찰하도록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카메라를 손에 들고 싶어지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가 카메라의 젖빛유리판 너머로 현실의 이면을 발견했듯이, 독자들은 평범하고 단순해 보이는 그의 사진들과 이야기를 통해 그 속에 존재하는 중요한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업에서 다루지 못한 정보들은 엮은이의 자세한 주석으로, 한국 독자에게 생소한 이탈리아 관련 정보들은 옮긴이 주로 보완했다. 루이지 기리의 대표작과 관련한 시각자료도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고, 책끝에는 작가 잔니 첼라티가 기록한 루이기 기리를 향한 우정 어린 회고가 있어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