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북한산에 개가 산다는 단순한 사실은 그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광범위한 조건들이 구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영역 행동을 발휘할 수 있을 만한 면적, 먹고 살 만큼의 생태계, 번식으로 존재가 지속할 수 있을 만한 개체군 등 개 한 마리는 이 모든 생태적 요소들을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시적 존재이다. 북한산은 찡찡이와 단비라는 작품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 권도연
사월의눈 18번째 책 『북한산』은 권도연 작가가 2년여간 북한산에서 찍은 들개 사진 연작을 묶은 사진책이다. 총 61점의 흑백사진과 함께 작가가 쓴 단편 관찰기가 수록되어 있다. 시각문화 연구자 윤원화와 기계비평가 이영준이 에세이를 보탰다.
사진가 권도연은 2017년도부터 야생초목에 대한 관심에서 북한산을 관찰하던 중 인근에서 서식하는 들개 무리를 만나게 된다. 북한산 사진과 함께 여러 다양한 들개 초상 사진들이 포착된 '북한산' 시리즈의 출발 배경이다. 이후 작가는 2년간 매일 북한산을 오르내리며 들개들을 관찰하고, 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빼어난 조형의 사진에는 여러 개들의 모습이 포착되었지만, 그 과정은 여러 들개 무리와 사진가간의 대칭적 관계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교감이었다. 시각문화연구자 윤원화가 썼듯이 이 개들은 “자연 또는 문화가 아니라 그 두 범주가 혼성되고 관리되는 어딘가에 위치”한다. 기계비평가 이영준 또한 “들개의 뒤에서는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치환이 일어난다.”라고 썼다.
“북한산”이라는 제목의 사진책에 북한산이 아닌 들개 사진들이 등장하는 낯섦과 마찬가지로 들개들 또한 본래부터 북한산이 친숙한 서식지는 아니었다. 북한산은 '뉴타운'이라는 이름의 도시 개발로 인해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한때 '반려견'으로서 인간과 함께 거주했던 사진 속 이들의 '조상'들은 버려진 존재였다. 인간이 버린 그들이 인간을 떠나 자신들의 터를 마련한 곳은 뉴타운 인근의 북한산이었다. 이후 북한산에는 개들이 살게 되었다. 권도연 작가가 찍은 들개들은 그렇게 쫓겨난 개들의 '후예'들이고, 그들에게 북한산은 삶의 터전이다.
책에는 작가가 특별히 이름을 지어준 들개들이 등장하며, 작가만의 고유한 관찰기가 수록되어 사진 이해를 돕는다.
책 속으로
먹이를 빼앗기지 않으려 사력을 다하는 개들과 달리 찡찡이는 개들이 으르렁거리고 접근하면 먹고 있던 것들도 내줬다. 다른 개들에게 물리고 찢기고 상처 난 흔적들이 그의 얼굴에 남아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 외모 탓에 등산객은 그를 마주치면 소리를 질렀다. 찡찡이는 그때마다 아기가 우는 것 같은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찡찡이는 언제나 혼자 움직였다. 어쩌면 정착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듯했다.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 시간 외에는 털을 가다듬고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냈다. 정오가 되어 날이 뜨거워지면 자신이 파놓은 굴로 들어가 더위를 피했다.
- 권도연, 「찡찡이」
가을이 되고 이틀 연속 비가 내리더니 날이 개었다. 산꼭대기가 따뜻해지자, 검은입이 새끼를 데리고 완만한 오솔길을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생후 3개월이 지난 새끼는 체격이 벌써 엄마 반 정도나 되었다. 새끼의 등에는 짓무른 피부병이 보였다. 평안한 삶을 기원하며 ‘가뭄에 내리는 비’라는 의미의 단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단비가 나뭇잎을 밟고 지나갈 때면 가볍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비는 텃밭 여기저기를 오가며 뛰어다녔다. 녀석에게는 이곳이 유년 세계의 전부일 것이다.
이른 아침, 검은입과 단비가 등산로를 향해 걸어갔다. 낯선 깡통을 들여다보느라 뒤처졌던 단비가 엄마를 막 따라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앞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단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바위굴로 돌아온 단비는 몸을 덜덜 떨었다. 검은입은 돌아오지 않았다.
검은입의 마지막을 상상해본다. 누군가 봉우리까지 올라 온 일, 마취총을 맞고 시야가 시꺼멓게 된 채 수풀 속으로 도망친 일, 흰다리와 함께 동물보호소에서 눈을 뜬 일, 며칠이 지난 후 다른 개들이 주사를 맞고 처음에는 하나둘, 차차 한꺼번에 기침하고 냄새 고약한 콧물을 흘리고 턱과 다리를 떨며 쓰러진 일, 몸의 온기가 싹 걷힌 일, 그리고 내 아가.
- 권도연, 「검은입」
작가는 자연을 탐구하는 박물학자처럼 집 근처의 북한산의 현장 조사를 시작했지만, 개들을 통해서 이곳을 유서 깊은 이종 간 교류의 역사를 가진 인간과 개가 서로 간에 위협적인 외래종으로서 대치하는 아이러니한 장소로 재발견했다. 인간이 점유한 영토로서 북한산이 개들을 환대하지 않듯이, 개들이 점유한 영토로서 북한산은 인간을 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산에서 개들을 박멸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입산을 전면 금지하고 인간을 몰아내는 것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인간과 개는 서로의 거울상처럼, 오래된 암반으로 이루어진 산을 밟고 다니며 그 산의 풍경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은 바꾸어 놓는다. (중략)
작가는 개들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인간에 가깝게 의인화되거나 거꾸로 지나치게 인간과 무관한 풍경으로 자연화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애썼는데, 왜냐하면 이 개들은 진실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위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개들은 익숙한 풍경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변형시킨다. 일단 그들을 보고 나면, 평범해 보이는 산의 풍경조차 개들이 숨어들어 어디선가 계속 살아가고 있는 산, 또는 그렇게 살아가던 개들이 하나 둘씩 붙잡혀 사라지고 있는 산이라는 새로운 의미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런 식으로 이 개들은 관객의 눈 속으로 침투하고 그 눈에 비치는 것들을 조금은 달라지게 만든다.
- 윤원화, 「개의 초상 또는 산의 풍경」
2017년, 권도연이 북한산에 깃들어 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북한산의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것들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생명력과는 다른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흔히 생명력이라고 하면 심장의 고동이 뛰고 숨을 힘차게 쉬고 더운 피가 흐르고 귀는 쫑긋한 적극적이고 도드라지는 기운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권도연이 북한산에서 본 생명력은 그런게 아니었다. 그것은 산 속에 녹아 있는 어떤 존재들, 바위와 시냇물과 하늘처럼 가만히 있으면서 튀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권도연은 관찰하거나 포착하기를 그만 두고 가만히 앉아서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점차 시간이 지나며 개들은 나를 나무 보듯, 자신을 해치지 않을 산속의 또 다른 친구를 보듯 받아들여 주었다”고 한다. 개들이 그를 나무 보듯 한 이유는 그가 실제로 나무가 됐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떻게 나무가 되느냐고. 권도연은 처음부터 나무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혈관과 폐속에 나무가 들어 있다. 그러니 개들도 그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비봉의 흰다리, 족두리봉의 검은입, 숨은벽의 뾰족귀 같은 개들이 계속해서 권도연에게 되돌아 왔다. 그러자 권도연은 자신에게 사진가가 들어 있음을 기억해내고는 자신을 치우고 그 자리에 슬그머니 사진가를 올려놓았다. 개들도 사진가를 두려워 하지 않고 북한산의 일부인 그 상태대로 살게 됐다. 그래서 권도연의 시선에게 북한산 개는 사나운 들개도 아니고 그렇다고 귀여운 애완동물도 아니다.
- 이영준, 「북한산의 바위와 개들의 전설」
저자 소개
권도연은 문학과 사진을 공부했다. 사진을 이용해 지식과 기억, 시각 이미지와 언어의 관계를 탐색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주요 작업으로 〈SF〉, 〈북한산〉, 〈섬광기억〉, 〈고고학〉, 〈개념어사전〉, 〈애송이의 여행〉이 있으며 미국 포토페스트 비엔날레, 인천아트플랫폼,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저서로 『고고학』(KT&G 상상마당, 2015), 『Flashbulb Memory』(Hatje Cantz, 2020) 등이 있으며, 고양시에서 유경, 두아와 살고 있다. www.dogwon.com
참여자 소개
윤원화는 시각문화 연구자이다. 저서로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보스토크 프레스, 2018),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워크룸프레스, 2016) 등이 있으며, 역서로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현실문화 2011), 『기록시스템 1800/1900』(문학동네, 2015) 등이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일민미술관, 2014)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
이영준은 중학교 때인 1974년 처음 아버지를 따라 북한산에 올랐다. 그때 처음 본 백운대의 거대한 바위의 양감과 질감, 존재감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조형적 세계상의 모태가 됐다. 이영준은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를 6년간 다녔지만 북한산에 비하면 관악산의 산악미가 많이 떨어진다고 봤기 때문에 관악산에 한번도 올라가지 않았다. 북한산이 자연경관에서 역사경관으로, 나중에는 도시경관으로 변천하는 과정과 이영준의 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글 「나만의 북한산—개인, 역사, 도시」를 『이미지비평 — 깻잎머리에서 인공위성까지』(눈빛, 2004)에 수록했다. 지금은 기계비평가로 있지만 언젠가 더 이상 비평할 기계가 없어지면 산악비평가가 될 예정이다.
책 소개
북한산에 개가 산다는 단순한 사실은 그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광범위한 조건들이 구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영역 행동을 발휘할 수 있을 만한 면적, 먹고 살 만큼의 생태계, 번식으로 존재가 지속할 수 있을 만한 개체군 등 개 한 마리는 이 모든 생태적 요소들을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시적 존재이다. 북한산은 찡찡이와 단비라는 작품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 권도연
사월의눈 18번째 책 『북한산』은 권도연 작가가 2년여간 북한산에서 찍은 들개 사진 연작을 묶은 사진책이다. 총 61점의 흑백사진과 함께 작가가 쓴 단편 관찰기가 수록되어 있다. 시각문화 연구자 윤원화와 기계비평가 이영준이 에세이를 보탰다.
사진가 권도연은 2017년도부터 야생초목에 대한 관심에서 북한산을 관찰하던 중 인근에서 서식하는 들개 무리를 만나게 된다. 북한산 사진과 함께 여러 다양한 들개 초상 사진들이 포착된 '북한산' 시리즈의 출발 배경이다. 이후 작가는 2년간 매일 북한산을 오르내리며 들개들을 관찰하고, 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빼어난 조형의 사진에는 여러 개들의 모습이 포착되었지만, 그 과정은 여러 들개 무리와 사진가간의 대칭적 관계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교감이었다. 시각문화연구자 윤원화가 썼듯이 이 개들은 “자연 또는 문화가 아니라 그 두 범주가 혼성되고 관리되는 어딘가에 위치”한다. 기계비평가 이영준 또한 “들개의 뒤에서는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치환이 일어난다.”라고 썼다.
“북한산”이라는 제목의 사진책에 북한산이 아닌 들개 사진들이 등장하는 낯섦과 마찬가지로 들개들 또한 본래부터 북한산이 친숙한 서식지는 아니었다. 북한산은 '뉴타운'이라는 이름의 도시 개발로 인해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한때 '반려견'으로서 인간과 함께 거주했던 사진 속 이들의 '조상'들은 버려진 존재였다. 인간이 버린 그들이 인간을 떠나 자신들의 터를 마련한 곳은 뉴타운 인근의 북한산이었다. 이후 북한산에는 개들이 살게 되었다. 권도연 작가가 찍은 들개들은 그렇게 쫓겨난 개들의 '후예'들이고, 그들에게 북한산은 삶의 터전이다.
책에는 작가가 특별히 이름을 지어준 들개들이 등장하며, 작가만의 고유한 관찰기가 수록되어 사진 이해를 돕는다.
책 속으로
먹이를 빼앗기지 않으려 사력을 다하는 개들과 달리 찡찡이는 개들이 으르렁거리고 접근하면 먹고 있던 것들도 내줬다. 다른 개들에게 물리고 찢기고 상처 난 흔적들이 그의 얼굴에 남아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 외모 탓에 등산객은 그를 마주치면 소리를 질렀다. 찡찡이는 그때마다 아기가 우는 것 같은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찡찡이는 언제나 혼자 움직였다. 어쩌면 정착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듯했다.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 시간 외에는 털을 가다듬고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냈다. 정오가 되어 날이 뜨거워지면 자신이 파놓은 굴로 들어가 더위를 피했다.
- 권도연, 「찡찡이」
가을이 되고 이틀 연속 비가 내리더니 날이 개었다. 산꼭대기가 따뜻해지자, 검은입이 새끼를 데리고 완만한 오솔길을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생후 3개월이 지난 새끼는 체격이 벌써 엄마 반 정도나 되었다. 새끼의 등에는 짓무른 피부병이 보였다. 평안한 삶을 기원하며 ‘가뭄에 내리는 비’라는 의미의 단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단비가 나뭇잎을 밟고 지나갈 때면 가볍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비는 텃밭 여기저기를 오가며 뛰어다녔다. 녀석에게는 이곳이 유년 세계의 전부일 것이다.
이른 아침, 검은입과 단비가 등산로를 향해 걸어갔다. 낯선 깡통을 들여다보느라 뒤처졌던 단비가 엄마를 막 따라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앞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단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바위굴로 돌아온 단비는 몸을 덜덜 떨었다. 검은입은 돌아오지 않았다.
검은입의 마지막을 상상해본다. 누군가 봉우리까지 올라 온 일, 마취총을 맞고 시야가 시꺼멓게 된 채 수풀 속으로 도망친 일, 흰다리와 함께 동물보호소에서 눈을 뜬 일, 며칠이 지난 후 다른 개들이 주사를 맞고 처음에는 하나둘, 차차 한꺼번에 기침하고 냄새 고약한 콧물을 흘리고 턱과 다리를 떨며 쓰러진 일, 몸의 온기가 싹 걷힌 일, 그리고 내 아가.
- 권도연, 「검은입」
작가는 자연을 탐구하는 박물학자처럼 집 근처의 북한산의 현장 조사를 시작했지만, 개들을 통해서 이곳을 유서 깊은 이종 간 교류의 역사를 가진 인간과 개가 서로 간에 위협적인 외래종으로서 대치하는 아이러니한 장소로 재발견했다. 인간이 점유한 영토로서 북한산이 개들을 환대하지 않듯이, 개들이 점유한 영토로서 북한산은 인간을 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산에서 개들을 박멸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입산을 전면 금지하고 인간을 몰아내는 것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인간과 개는 서로의 거울상처럼, 오래된 암반으로 이루어진 산을 밟고 다니며 그 산의 풍경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은 바꾸어 놓는다. (중략)
작가는 개들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인간에 가깝게 의인화되거나 거꾸로 지나치게 인간과 무관한 풍경으로 자연화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애썼는데, 왜냐하면 이 개들은 진실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위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개들은 익숙한 풍경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변형시킨다. 일단 그들을 보고 나면, 평범해 보이는 산의 풍경조차 개들이 숨어들어 어디선가 계속 살아가고 있는 산, 또는 그렇게 살아가던 개들이 하나 둘씩 붙잡혀 사라지고 있는 산이라는 새로운 의미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런 식으로 이 개들은 관객의 눈 속으로 침투하고 그 눈에 비치는 것들을 조금은 달라지게 만든다.
- 윤원화, 「개의 초상 또는 산의 풍경」
2017년, 권도연이 북한산에 깃들어 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북한산의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것들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생명력과는 다른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흔히 생명력이라고 하면 심장의 고동이 뛰고 숨을 힘차게 쉬고 더운 피가 흐르고 귀는 쫑긋한 적극적이고 도드라지는 기운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권도연이 북한산에서 본 생명력은 그런게 아니었다. 그것은 산 속에 녹아 있는 어떤 존재들, 바위와 시냇물과 하늘처럼 가만히 있으면서 튀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권도연은 관찰하거나 포착하기를 그만 두고 가만히 앉아서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점차 시간이 지나며 개들은 나를 나무 보듯, 자신을 해치지 않을 산속의 또 다른 친구를 보듯 받아들여 주었다”고 한다. 개들이 그를 나무 보듯 한 이유는 그가 실제로 나무가 됐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떻게 나무가 되느냐고. 권도연은 처음부터 나무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혈관과 폐속에 나무가 들어 있다. 그러니 개들도 그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비봉의 흰다리, 족두리봉의 검은입, 숨은벽의 뾰족귀 같은 개들이 계속해서 권도연에게 되돌아 왔다. 그러자 권도연은 자신에게 사진가가 들어 있음을 기억해내고는 자신을 치우고 그 자리에 슬그머니 사진가를 올려놓았다. 개들도 사진가를 두려워 하지 않고 북한산의 일부인 그 상태대로 살게 됐다. 그래서 권도연의 시선에게 북한산 개는 사나운 들개도 아니고 그렇다고 귀여운 애완동물도 아니다.
- 이영준, 「북한산의 바위와 개들의 전설」
저자 소개
권도연은 문학과 사진을 공부했다. 사진을 이용해 지식과 기억, 시각 이미지와 언어의 관계를 탐색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주요 작업으로 〈SF〉, 〈북한산〉, 〈섬광기억〉, 〈고고학〉, 〈개념어사전〉, 〈애송이의 여행〉이 있으며 미국 포토페스트 비엔날레, 인천아트플랫폼,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저서로 『고고학』(KT&G 상상마당, 2015), 『Flashbulb Memory』(Hatje Cantz, 2020) 등이 있으며, 고양시에서 유경, 두아와 살고 있다. www.dogwon.com
참여자 소개
윤원화는 시각문화 연구자이다. 저서로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보스토크 프레스, 2018),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워크룸프레스, 2016) 등이 있으며, 역서로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현실문화 2011), 『기록시스템 1800/1900』(문학동네, 2015) 등이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일민미술관, 2014)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
이영준은 중학교 때인 1974년 처음 아버지를 따라 북한산에 올랐다. 그때 처음 본 백운대의 거대한 바위의 양감과 질감, 존재감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조형적 세계상의 모태가 됐다. 이영준은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를 6년간 다녔지만 북한산에 비하면 관악산의 산악미가 많이 떨어진다고 봤기 때문에 관악산에 한번도 올라가지 않았다. 북한산이 자연경관에서 역사경관으로, 나중에는 도시경관으로 변천하는 과정과 이영준의 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글 「나만의 북한산—개인, 역사, 도시」를 『이미지비평 — 깻잎머리에서 인공위성까지』(눈빛, 2004)에 수록했다. 지금은 기계비평가로 있지만 언젠가 더 이상 비평할 기계가 없어지면 산악비평가가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