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2014년 4월 16일 오전, 인천을 떠나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이 사고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을 포함해 총 30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2017년 출판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홍진훤 사진가의 사진 연작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와 김연수 소설가의 단편 소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를 엮은 사진 소설이다. 이중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단원고 학생들의 수학여행 일정표에 나와있는 장소를 사진가 홍진훤이 찾아다니며 기록한 작업이다.
2023년, 이 사진 소설의 특별판을 발행한다. 기존 작품에 김연수 소설가의 일기이자 산문이기도 한 「2014년의 일기를 2023년에 다시 쓰는 이유」와 홍진훤 사진가의 사진과 글로 구성된 「플래시 백」을 더했다. 추가한 두 작품은 2014년 4월 16일의 시간으로 돌아가 세월호 참사를 서술한다. 새로운 편집과 디자인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특별판은 2023년의 시점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과 재현의 새로고침이고자 한다.
책 속으로
우리에게는 아직도 지켜볼 꽃잎이 남아 있다. 나는 그 꽃잎 하나하나를 벌써부터 기억하고 있다는걸 네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 뿐.
-김연수,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중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김연수,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중
우리가 인생을 다시 살 수는 없겠지만, 다시 쓸 수는 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채 인생을 한 번 살고, 그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얼마든지 다시 살 수 있다. 조금 더 미래로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넓은 시야가 생겼고, 그래서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다. 인생의 이야기가 달라지면 과거의 내가 달라지고, 그 변화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즉각적으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그 여파는 먼 미래까지 나아간다.다시 쓰는 일은 과거의 나를 바꾸는 게 아니라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바꾼다.
-김연수, 「2014년의 일기를 2023년에 다시 쓰는 이유」 중
진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 역시 부정어 ‘a’와 망각을 뜻하는 ‘레테이아(letheia)’의 조합이라고 한다. 진실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강변하자면,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이 진실이 되리라. 그리고 과거의 기억은 미래를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진실은 우리가 미래를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과거의 진실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김연수, 「2014년의 일기를 2023년에 다시 쓰는 이유」 중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또한 미래를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그리고 그 기억들은 진실이 되어 지금 이 순간의 우리를 바꾼다. 그러므로 부디, 바라건대, 꼭, 아무쪼록......
세월호의 아이들이 남은 우리에게 부탁할 게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자신들을,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자신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잊지 말아달라는 것이 아닐까? 그 아이들을 기억하는 일은 미래의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남은 우리가 기억하려고 애쓸 때,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이 일어나지 않는 미래가,혹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일어나는 미래가 찾아올 테니까.
-김연수, 「2014년의 일기를 2023년에 다시 쓰는 이유」 중
2014년 4월 3일 오후 3시 37분
2014년 4월 나는 제주에 있었다. 제주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을 찾아봤다. 이덕구 산전이었다. 4·3 당시 무장항쟁의 사령관이었던 그의 은신처였다. 이곳에서 지내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살되었고 무장대는 궤멸하였다.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남의 집 담을 넘어 산으로 기어 올라갔다.
제멋대로 뻗어 나간 나무들을 제치며 자그마한 돌무덩이들과 노쇠 솥이 남겨진 산전에 도착했다. 대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는, 명도와 채도가 모두 사라진 풍경과 축축한 공기 사이로 노란색 해군기지 반대 깃발이 보였다.
누군가 이곳에 가져다 놓은 그 깃발이 “모든 비극은 섬으로 흐른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축 처져 산전 한구석에 걸려 있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제주도였다.
내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날 이전의 제주도.
-홍진훤, 「플래시 백」 중
2014년 5월 1일 오전 8시 58분
지금의 안산은 이주노동자들의 도시다. 이 이주는 국경뿐 아니라 지역과 계층 간의 경계 역시 포함한다. 이리저리 내몰린 노동자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반월공단이었다.
안산 반월공단의 시작은 태백 출신 광부들의 집단 이주와 닿아있다. 탄광이 폐광되면서 직업을 잃은 수많은 강원도의 탄광 노동자들이 안산으로 몰려들었다. 안산에서 태백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여전히 하루에 다섯 번씩 운행 중이다.
기자 신윤동욱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안산은 떠도는 노동자들이 도착한 현재의 종착역이다. 잊혀진 구로와 지워진 태백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안산의 오늘에 녹아 있다.”
그런 곳에 세월호가 더해졌다. 저 조그마한 빌라마다 메울 수 없는 큰 구멍이 뚫렸다. 안산이라는 도시는 마치 거대한 싱크홀 같았다.
-홍진훤, 「플래시 백」 중
2014년 5월 10일 오후 3시 49분
안산 합동분향소에 사람들이 모여 하늘로 노란 풍선을 날렸다. 풍선 하나가 전봇대에 걸려 날아가지 못하고 버둥거린다. 모두가 그 풍선 하나를 바라보며 애써 침묵을 지킨다. 전봇대에 매달린 마음들이 발을 떼지 못하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다. 전봇대에 갇혀버린 노란 풍선을 다 함께 바라보는 풍경을 보자니 그날 모두의 모습이 겹친다.
언제부턴가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면 그날 뭐 하고 있었는지를 묻는다. 사람들 대부분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날 먹었던 음식 이야기를 한다. 나 역시 그날 먹었던 음식만은 명확히 기억이 난다. 일상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장면을 모두가 함께 바라보며 마지막 온전했던 일상을 기억에 남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홍진훤, 「플래시 백」 중
2015년 4월 16일 오후 8시
사람들은 더이상 구조 실패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부는 구조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구조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데 1년이 걸렸다. 질문은 더욱더 복잡해진다. 정부는 왜 구조하지 않았나. 수많은 가설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를 정치적인 사안이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스템을 불신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혐오를 대체재로 선택했다. 또 다른 세월호가 시작되고 있었다.
-홍진훤, 「플래시 백」 중
2016년 4월 16일 오후 3시 8분
2주기 안산의 하늘은 온통 먹구름이었다.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공식 무대와 조금 떨어져 따로 자리를 잡았다. 세월호가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가끔씩 비가 흩날렸고 적지 않은 바람이 불었다. 비옷이 바람에 흔들리면 벚꽃이 내렸다.
한 생존자 학생의 인터뷰를 본 기억이 있다. 언제 친구들이 가장 생각나냐는 질문에 벚꽃을 볼 때라고 했다. 그날부터 나도 벚꽃을 보면 바다가 생각난다. 벚꽃을 많이 찍어두기로 했다.
-홍진훤, 「플래시 백」 중
2019년 2월 9일 오후 2시 12분
세월호 희생자 유예은의 아버지 유경근씨, 방송 노동환경 실태를 고발하고 자살한 이한빛 피디의 어머니 김혜영씨,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의 아버지 황상기씨,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사망한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고 김용균씨의 영결식에서 백기완 선생이 글을 쓴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고 있다. 역사적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역사가 될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희생자들의 연대, 소수자들의 연대, 피착취자들의 연대 세월호 5년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홍진훤, 「플래시 백」 중
저자 소개
홍진훤
사진과 영화, 웹 프로그래밍을 매개로 이미지, 푸티지, 데이터로 구성되는 일종의 매트리스를 생성하고, 이를 통해 간과되고 있는 국내외의 중대한 사회정치적 사건들을 조명한다.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21), 국립현대미술관 (2019), 아르코미술관 (2018), 제1회 제주비엔날레 (2017), 제6회 대구사진비엔날레 (2016)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김연수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장편소설 『7번국도 Revisited』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일곱 해의 마지막』,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우리가 보낸 순간』 『지지 않는다는 말』 『소설가의 일』 『시절일기』 등이 있다.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을 수상했다.
책 소개
2014년 4월 16일 오전, 인천을 떠나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이 사고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을 포함해 총 30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2017년 출판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홍진훤 사진가의 사진 연작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와 김연수 소설가의 단편 소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를 엮은 사진 소설이다. 이중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단원고 학생들의 수학여행 일정표에 나와있는 장소를 사진가 홍진훤이 찾아다니며 기록한 작업이다.
2023년, 이 사진 소설의 특별판을 발행한다. 기존 작품에 김연수 소설가의 일기이자 산문이기도 한 「2014년의 일기를 2023년에 다시 쓰는 이유」와 홍진훤 사진가의 사진과 글로 구성된 「플래시 백」을 더했다. 추가한 두 작품은 2014년 4월 16일의 시간으로 돌아가 세월호 참사를 서술한다. 새로운 편집과 디자인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특별판은 2023년의 시점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과 재현의 새로고침이고자 한다.
책 속으로
우리에게는 아직도 지켜볼 꽃잎이 남아 있다. 나는 그 꽃잎 하나하나를 벌써부터 기억하고 있다는걸 네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 뿐.
-김연수,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중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김연수,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중
우리가 인생을 다시 살 수는 없겠지만, 다시 쓸 수는 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채 인생을 한 번 살고, 그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얼마든지 다시 살 수 있다. 조금 더 미래로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넓은 시야가 생겼고, 그래서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다. 인생의 이야기가 달라지면 과거의 내가 달라지고, 그 변화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즉각적으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그 여파는 먼 미래까지 나아간다.다시 쓰는 일은 과거의 나를 바꾸는 게 아니라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바꾼다.
-김연수, 「2014년의 일기를 2023년에 다시 쓰는 이유」 중
진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 역시 부정어 ‘a’와 망각을 뜻하는 ‘레테이아(letheia)’의 조합이라고 한다. 진실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강변하자면,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이 진실이 되리라. 그리고 과거의 기억은 미래를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진실은 우리가 미래를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과거의 진실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김연수, 「2014년의 일기를 2023년에 다시 쓰는 이유」 중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또한 미래를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그리고 그 기억들은 진실이 되어 지금 이 순간의 우리를 바꾼다. 그러므로 부디, 바라건대, 꼭, 아무쪼록......
세월호의 아이들이 남은 우리에게 부탁할 게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자신들을,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자신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잊지 말아달라는 것이 아닐까? 그 아이들을 기억하는 일은 미래의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남은 우리가 기억하려고 애쓸 때,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이 일어나지 않는 미래가,혹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일어나는 미래가 찾아올 테니까.
-김연수, 「2014년의 일기를 2023년에 다시 쓰는 이유」 중
2014년 4월 3일 오후 3시 37분
2014년 4월 나는 제주에 있었다. 제주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을 찾아봤다. 이덕구 산전이었다. 4·3 당시 무장항쟁의 사령관이었던 그의 은신처였다. 이곳에서 지내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살되었고 무장대는 궤멸하였다.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남의 집 담을 넘어 산으로 기어 올라갔다.
제멋대로 뻗어 나간 나무들을 제치며 자그마한 돌무덩이들과 노쇠 솥이 남겨진 산전에 도착했다. 대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는, 명도와 채도가 모두 사라진 풍경과 축축한 공기 사이로 노란색 해군기지 반대 깃발이 보였다.
누군가 이곳에 가져다 놓은 그 깃발이 “모든 비극은 섬으로 흐른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축 처져 산전 한구석에 걸려 있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제주도였다.
내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날 이전의 제주도.
-홍진훤, 「플래시 백」 중
2014년 5월 1일 오전 8시 58분
지금의 안산은 이주노동자들의 도시다. 이 이주는 국경뿐 아니라 지역과 계층 간의 경계 역시 포함한다. 이리저리 내몰린 노동자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반월공단이었다.
안산 반월공단의 시작은 태백 출신 광부들의 집단 이주와 닿아있다. 탄광이 폐광되면서 직업을 잃은 수많은 강원도의 탄광 노동자들이 안산으로 몰려들었다. 안산에서 태백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여전히 하루에 다섯 번씩 운행 중이다.
기자 신윤동욱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안산은 떠도는 노동자들이 도착한 현재의 종착역이다. 잊혀진 구로와 지워진 태백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안산의 오늘에 녹아 있다.”
그런 곳에 세월호가 더해졌다. 저 조그마한 빌라마다 메울 수 없는 큰 구멍이 뚫렸다. 안산이라는 도시는 마치 거대한 싱크홀 같았다.
-홍진훤, 「플래시 백」 중
2014년 5월 10일 오후 3시 49분
안산 합동분향소에 사람들이 모여 하늘로 노란 풍선을 날렸다. 풍선 하나가 전봇대에 걸려 날아가지 못하고 버둥거린다. 모두가 그 풍선 하나를 바라보며 애써 침묵을 지킨다. 전봇대에 매달린 마음들이 발을 떼지 못하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다. 전봇대에 갇혀버린 노란 풍선을 다 함께 바라보는 풍경을 보자니 그날 모두의 모습이 겹친다.
언제부턴가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면 그날 뭐 하고 있었는지를 묻는다. 사람들 대부분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날 먹었던 음식 이야기를 한다. 나 역시 그날 먹었던 음식만은 명확히 기억이 난다. 일상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장면을 모두가 함께 바라보며 마지막 온전했던 일상을 기억에 남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홍진훤, 「플래시 백」 중
2015년 4월 16일 오후 8시
사람들은 더이상 구조 실패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부는 구조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구조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데 1년이 걸렸다. 질문은 더욱더 복잡해진다. 정부는 왜 구조하지 않았나. 수많은 가설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를 정치적인 사안이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스템을 불신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혐오를 대체재로 선택했다. 또 다른 세월호가 시작되고 있었다.
-홍진훤, 「플래시 백」 중
2016년 4월 16일 오후 3시 8분
2주기 안산의 하늘은 온통 먹구름이었다.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공식 무대와 조금 떨어져 따로 자리를 잡았다. 세월호가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가끔씩 비가 흩날렸고 적지 않은 바람이 불었다. 비옷이 바람에 흔들리면 벚꽃이 내렸다.
한 생존자 학생의 인터뷰를 본 기억이 있다. 언제 친구들이 가장 생각나냐는 질문에 벚꽃을 볼 때라고 했다. 그날부터 나도 벚꽃을 보면 바다가 생각난다. 벚꽃을 많이 찍어두기로 했다.
-홍진훤, 「플래시 백」 중
2019년 2월 9일 오후 2시 12분
세월호 희생자 유예은의 아버지 유경근씨, 방송 노동환경 실태를 고발하고 자살한 이한빛 피디의 어머니 김혜영씨,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의 아버지 황상기씨,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사망한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고 김용균씨의 영결식에서 백기완 선생이 글을 쓴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고 있다. 역사적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역사가 될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희생자들의 연대, 소수자들의 연대, 피착취자들의 연대 세월호 5년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홍진훤, 「플래시 백」 중
저자 소개
홍진훤
사진과 영화, 웹 프로그래밍을 매개로 이미지, 푸티지, 데이터로 구성되는 일종의 매트리스를 생성하고, 이를 통해 간과되고 있는 국내외의 중대한 사회정치적 사건들을 조명한다.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21), 국립현대미술관 (2019), 아르코미술관 (2018), 제1회 제주비엔날레 (2017), 제6회 대구사진비엔날레 (2016)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김연수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장편소설 『7번국도 Revisited』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일곱 해의 마지막』,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우리가 보낸 순간』 『지지 않는다는 말』 『소설가의 일』 『시절일기』 등이 있다.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