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진: 저자 제공
책 소개
한국 디자인사는 어떻게 쓰여왔는가, 그리고 누구의 시선으로 쓰였는가? 우리의 디자인사에는 수많은 협업자로 구성된 디자인 현장과 그 속에서 묵묵히 일해온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누락되어 있다.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는 영웅적 개인과 기념비적 작업으로 쓰여온 매끈한 한국 디자인사에 의문을 표하며 지역, 현장, 여성의 목소리로 보편사의 공백을 풍부하게 채워넣는다.
1963년생 이영희는 1990년대 초반, 대구에서 편집 디자인 회사 ‘그래콤’을 설립한 후 30여 년간 사보와 사사를 중심으로 한 상업 출판 활동을 전개했다. 이 프로젝트는 이영희를 필두로 지역에서 활동한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구술과 아카이브로, 한국 디자인의 과거를 바라보는 대안적 방법론을 탐구한다. 이는 한국 디자인사의 기록되지 않은 가장 보편적인 얼굴과 서사를 찾아나가는 여정이다.
기획의 글
한국 디자인사는 어떻게 쓰여왔는가, 그리고 누구의 시선으로 쓰였는가? 소수의 영웅적인 개인과 몇 개의 기념비적인 작업으로 구성된 한국 디자인사의 얼굴을 상상해 보자. 서울의 주요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자본과 권력을 가진 기업을 위해 일하거나, 작가주의적 태도로 작업을 생산하며 단독자로서의 예술가이자 문화생산자로 호명되는 중장년의 남성 디자이너의 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한국 디자인사에는 수많은 협업자들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디자인 현장과 그 속에서 묵묵히 일해온 이름 없는 자들의 이야기가 누락되어 있다. 기존의 역사 쓰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서구에서는 탈식민주의의 맥락에서 주류 디자인사에 다뤄지지 않은 지역, 여성, 유색인종, 소수자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다시 쓰는 일련의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의 경우, 협소하게 규정된 디자인사 바깥에서 가시화되지 못한 디자인사(들)을 어떻게 발견하고 기록할 수 있을까?
1963년생 이영희는 지역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며 학보사 편집자로 일하던 중 편집 디자인에 입문했다. 1990년대 초반, 그래픽 디자이너 이찬수와 함께 대구에서 편집 디자인 회사 ‘그래콤’을 설립한 후 30여 년간 지역 현장에서 사보와 사사를 중심으로 한 상업 출판·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이영희의 구술과 현장에서 쌓인 작업물은 인쇄 골목을 필두로 한 협업, 납 활자에서 사진식자를 거친 디지털 출판으로의 이행, 매킨토시의 도입, 경제 성장과 사외보의 유행, 문선공과 오퍼레이터와 같은 사라진 공동생산자들, 지역 디자인 씬(scene)의 가능성과 같이 한국 디자인사의 기록되지 않은 공백들을 증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영희의 증언과 자료는 지역 그래픽 디자인 생산의 현장에 있던 여성 직업인의 시선으로 한국 디자인의 지난 과거를 바라보는 하나의 대안적 방법론을 탐구케 한다.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는 영웅적 개인과 기념비적 작업을 중심으로 쓰여온 매끈한 한국 디자인 서사를 심문하며 지역, 현장, 여성의 목소리로 보편사의 공백을 풍부하게 채워넣고자 한다. 이영희를 필두로 지역에서 활동했던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구술 채록과 실물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프로젝트는 한국 디자인사의 무수한 공백을 역사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이들의 증언으로 다시 쓰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는, 한국 디자인사의 기록되지 않은 가장 보편적인 얼굴과 서사를 찾아나가는 여정이다.
이 책을 만드는 과정은 우리가 서 있는 한국의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지반이 어느 탁월한 몇몇의 예외적인 성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역사의 귀퉁이에조차 남지 않았지만, 디자인 현장의 가장 보편적인 얼굴이었던 이영희(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것,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프로젝트가 지극히 사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혀두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충무로에서 처음으로 인쇄 감리를 다녀온 날이었을 것이다. 감리를 마치고 흥분한 상태로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부모님께 이야기했을 때, 돌아온 것은 뜻밖의 대답이었다. 아버지 역시 대학생 때 남산동 인쇄 골목에서 고모의 일을 도우며 인쇄소를 오갔다고 했다. 고모가 대구에서 편집 디자인 회사를 수십 년간 운영한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매끈한 디자인사의 거대한 흐름 위에 가장 내밀한 가정사가 포개어지는 순간이었다. 고모의 이름은 이영희다.
책 사진: 저자 제공
책 소개
한국 디자인사는 어떻게 쓰여왔는가, 그리고 누구의 시선으로 쓰였는가? 우리의 디자인사에는 수많은 협업자로 구성된 디자인 현장과 그 속에서 묵묵히 일해온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누락되어 있다.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는 영웅적 개인과 기념비적 작업으로 쓰여온 매끈한 한국 디자인사에 의문을 표하며 지역, 현장, 여성의 목소리로 보편사의 공백을 풍부하게 채워넣는다.
1963년생 이영희는 1990년대 초반, 대구에서 편집 디자인 회사 ‘그래콤’을 설립한 후 30여 년간 사보와 사사를 중심으로 한 상업 출판 활동을 전개했다. 이 프로젝트는 이영희를 필두로 지역에서 활동한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구술과 아카이브로, 한국 디자인의 과거를 바라보는 대안적 방법론을 탐구한다. 이는 한국 디자인사의 기록되지 않은 가장 보편적인 얼굴과 서사를 찾아나가는 여정이다.
기획의 글
한국 디자인사는 어떻게 쓰여왔는가, 그리고 누구의 시선으로 쓰였는가? 소수의 영웅적인 개인과 몇 개의 기념비적인 작업으로 구성된 한국 디자인사의 얼굴을 상상해 보자. 서울의 주요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자본과 권력을 가진 기업을 위해 일하거나, 작가주의적 태도로 작업을 생산하며 단독자로서의 예술가이자 문화생산자로 호명되는 중장년의 남성 디자이너의 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한국 디자인사에는 수많은 협업자들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디자인 현장과 그 속에서 묵묵히 일해온 이름 없는 자들의 이야기가 누락되어 있다. 기존의 역사 쓰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서구에서는 탈식민주의의 맥락에서 주류 디자인사에 다뤄지지 않은 지역, 여성, 유색인종, 소수자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다시 쓰는 일련의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의 경우, 협소하게 규정된 디자인사 바깥에서 가시화되지 못한 디자인사(들)을 어떻게 발견하고 기록할 수 있을까?
1963년생 이영희는 지역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며 학보사 편집자로 일하던 중 편집 디자인에 입문했다. 1990년대 초반, 그래픽 디자이너 이찬수와 함께 대구에서 편집 디자인 회사 ‘그래콤’을 설립한 후 30여 년간 지역 현장에서 사보와 사사를 중심으로 한 상업 출판·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이영희의 구술과 현장에서 쌓인 작업물은 인쇄 골목을 필두로 한 협업, 납 활자에서 사진식자를 거친 디지털 출판으로의 이행, 매킨토시의 도입, 경제 성장과 사외보의 유행, 문선공과 오퍼레이터와 같은 사라진 공동생산자들, 지역 디자인 씬(scene)의 가능성과 같이 한국 디자인사의 기록되지 않은 공백들을 증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영희의 증언과 자료는 지역 그래픽 디자인 생산의 현장에 있던 여성 직업인의 시선으로 한국 디자인의 지난 과거를 바라보는 하나의 대안적 방법론을 탐구케 한다.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는 영웅적 개인과 기념비적 작업을 중심으로 쓰여온 매끈한 한국 디자인 서사를 심문하며 지역, 현장, 여성의 목소리로 보편사의 공백을 풍부하게 채워넣고자 한다. 이영희를 필두로 지역에서 활동했던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구술 채록과 실물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프로젝트는 한국 디자인사의 무수한 공백을 역사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이들의 증언으로 다시 쓰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는, 한국 디자인사의 기록되지 않은 가장 보편적인 얼굴과 서사를 찾아나가는 여정이다.
이 책을 만드는 과정은 우리가 서 있는 한국의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지반이 어느 탁월한 몇몇의 예외적인 성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역사의 귀퉁이에조차 남지 않았지만, 디자인 현장의 가장 보편적인 얼굴이었던 이영희(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것,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프로젝트가 지극히 사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혀두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충무로에서 처음으로 인쇄 감리를 다녀온 날이었을 것이다. 감리를 마치고 흥분한 상태로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부모님께 이야기했을 때, 돌아온 것은 뜻밖의 대답이었다. 아버지 역시 대학생 때 남산동 인쇄 골목에서 고모의 일을 도우며 인쇄소를 오갔다고 했다. 고모가 대구에서 편집 디자인 회사를 수십 년간 운영한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매끈한 디자인사의 거대한 흐름 위에 가장 내밀한 가정사가 포개어지는 순간이었다. 고모의 이름은 이영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