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집’에 대한 고찰
중동과 동아시아, 유럽 등에서 개인전 및 단체전에 참여해 온 팔레스타인 사진가 아흘람 시블리는 1947년 시작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경 분쟁을 겪으며 자신이 소속되었던 곳으로부터 쫓겨나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깊이 이해했다.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의 집계에 따르면 이 분쟁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 약 칠십만 명이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약 오백만 명이 난민촌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를 두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랍어로 ‘재앙’을 뜻하는 ‘알 나크바(al-Nakba)’라고 부르며, 분쟁이 그들에게 근본을 뒤흔든 트라우마로 각인되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근원적 소속으로부터의 이산 경험은 그의 작업에 ‘집’이라는 주제를 불러들였다.
시블리에게 집은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주거지로서의 의미를 넘어 상실의 경험이 녹아든 모든 소속을 뜻한다. 이스라엘 국가 주도 하에 이뤄진 추방과 소수민족(베두인)의 억압을 다룬 ‘고테르’(pp.30–37), 이차대전 이후 살던 곳에서 쫓겨난 독일인들과 독일에 사는 이주노동자들의 각기 다른 운명을 담은 ‘하이마트’(pp.132–139), 보육 시설에서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돔 지에츠카. 당신이 없을 때 집은 굶주린다’(pp.80–89) 등 제각각 다른 장소에서 촬영된 사진들은 그 배경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의 집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군대에 자원한 팔레스타인 베두인족 후손들을 담은 ‘추적자’(pp.38–47)에서 두드러지듯이, 그의 작업에서 디아스포라 경험은 단순히 물질적 공간으로서의 집(국가)뿐만 아니라 분쟁으로부터 비롯된 정체성의 혼란과 변화 또한 포함한다.
한편 런던, 텔아비브 등 여러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스턴 엘지비티’(pp.54–59)에서의 집은 다름 아닌 ‘몸’으로,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성(性)의 몸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 그 자체이다. 이때 그동안 상실된 공간으로서 다시 되찾고자 분투했던 집은, 반대로 개인에게 부과하는 억압과 그 속에 은밀하게 내재된 정체성의 정치가 지닌 한계와 제약을 드러낸다.
전체를 조망하는 긴 시선
아흘람 시블리는 시리즈의 형태로 작업을 선보이는데, 한 장면의 강렬한 인상에 의존하는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예를 들어 ‘인정받지 못하는’(pp.22–29)은 아랍 알나임 마을의 전경을 담은 사진(pp.24–25)으로 출발해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서서히 보여준다. 전경 사진 속 마치 마을의 일부처럼 멀리서 포착된 여자, 바위 사이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pp.26–27),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담아낸 어린 형제(p.29 아래)의 모습…. 정해진 좌표 없이 조합된 사진들은 극심한 상황 속에서도 다정하고 단순한 마을의 일상을 드러낸다. 아담 심치크는 작가론 「관계 바로잡기: 아흘람 시블리의 작업에서 주목하는 배척된 사람들」에서 “시블리는 몽타주 기법을 사용해 일상에서 서사적인 차원을 이끌어낸다”고 설명한다.
심치크가 이야기한 몽타주 기법은 그가 2017년 「도큐멘타 14」에서 큐레이팅한 시블리의 작업 ‘하이마트’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데, 시블리는 유민 모두의 공통된 고통에 주목한다. 나치의 패배 이후 쫓겨난 독일계 후손들과 지중해 지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각각 이주의 시기와 이유는 다르지만 이산 체험을 주제로 한 곳에 겹쳐진다. 더 나아가 ‘응시’(pp.140–145)는 새로 촬영한 사진이 아닌, 기존의 ‘점거’(pp.120–131)와 ‘하이마트’ 중에서 다시 선택된 사진들을 조합한 시리즈로, 완전히 동떨어진 듯 보이는 상황에서 무엇이 비슷하고 다른지 탐구한다. 잃어버린 땅과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주제 아래 세계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시블리의 이같은 영화적 작법은 개별 사진들을 여러 맥락에서 다시 보게 하는 동시에 하나로 묶는다.
또한 그는 사진과 글을 함께 엮어 작품을 구성하는데, 이미지와 텍스트를 조합하는 방식은 1930년대 이래로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 예술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 왔다. 주민들이 쫓겨난 폐허를 보여주는 ‘아홉 권에 담은 와디 살리브’(pp.18–21)에서 시블리는 “내게는 그 폐허가 인간의, 사적인 사건들의 목격자로 보였다”고 말하며 지난 작업을 회고한다. 이어서 그는 다음의 문장들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나는 현재에서 과거를 보고 추적하고 연결했다. 어두운 공간에 빛을 들여 관심의 대상이 되도록 하고 무대로 만들었다. 나는 빛을 흩뿌려 잠든 영웅들을 깨웠다.” 그런가 하면 ‘골짜기’(pp.74–79)의 글은 좀더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구성되었다. 시블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국경 지역에 위치한 마을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사진이 촬영된 시기 이전에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담은 편지의 내용을 함께 전한다. 사진을 통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마을의 모습과 과거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편지가 합쳐져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된다. 후기로 갈수록 개별 사진에까지 장소, 시간, 상황, 사람들을 기록한 긴 글이 덧붙여지는데, 이는 산투 모포켕과 데이비드 골드블라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변화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시리즈의 형태, 글과 사진을 조합하는 그의 독특한 작업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약탈의 현장에 집중하면서도 점거된 이후의 현실이 어떻게 남고 또 복원되는지 끝까지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열린 시각에서, 열정적인 동시에 객관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담아내는 그만의 시선이다.
숨은 자들의 사진가
“아흘람 시블리는 숨은 자들의 사진가이다. 그녀는 숨어 있는 증거, 흔적, 장소, 사람들을 찍는다. 물론 팔레스타인 사람으로서 시블리는 숨겨진 것과 숨은 자의 편이며, 그들과 함께 숨은 채로 산다.” —존 버거
아흘람 시블리는 언제나 주요 세계보다는 그 아래 숨어 있는 하위 세계에 살고 있는 피지배층, 즉 ‘숨은 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작가론에 인용된 존 버거의 글 「유랑인의 조심스러움(A Nomadic Discretion)」에서의 표현처럼, 시블리는 ‘숨은 자들의 사진가’다. 심지어는 표면적으로 피해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게도 그는 관심을 쏟는데, 그 예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정찰병들을 담은 ‘추적자’가 있다. 역시 존 버거가 시블리의 사진집 『추적자(Trackers)』(2007)에 쓴 글 「이들은 무엇을 지니고 다니는 걸까?(What are they Carrying?)」 (이 글은 존 버거의 『모든것을 소중히 하라』와 『사진의 이해』에도 수록되어 있다)에서 주목한 바 있듯, 이 시리즈에서 시블리는 정찰병들을 단순히 배신자로 비난하기보다 그들이 그 선택을 하게 된 까닭과 그에 따른 대가에 대해 탐구한다. 사진 속 정찰병들의 집과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추적하며 시블리는 권력자들의 전유물인 단순화, 일반화를 거부하는 몸짓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시블리가 이토록 집요하게 숨은 자들, 배척된 사람들에게 주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그 스스로 팔레스타인 사람, 베두인이라는 정체성의 이유도 분명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피해자로 그려지는 사람들에게 존엄을 돌려주기 위함이다. 그는 숨은 자들의 복잡한 상황을 이해한다.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점거를 다룬 ‘점거’에서처럼 그는 침범, 약탈 등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포착해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만든 울타리가 정착민 스스로에게도 감옥 같은 공간을 만드는 아이러니, 이스라엘 점령군이 설치해 둔 창살과 그물망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는 전도의 흔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면화되는 통제들이 얽혀 모두 그의 피사체가 된다. 그밖에 다른 방법이 남아 있지 않을 때 그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움직임, 다시 말해 ‘숨는 행위’의 다양함과 차이를 시블리는 알고 있다.
작가 소개
아흘람 시블리(Ahlam Shibli, 1970– )는 팔레스타인의 사진가로, 다큐멘터리 미학을 지닌 그의 사진 작업은 ‘집’이라는 개념의 상반된 함의를 드러낸다. 집의 상실과 이에 맞선 싸움을 다루는 한편, 억압적인 정체성의 정치가 개인과 공동체에 부과하는 집 개념의 한계와 제약도 다룬다. 국제적으로 여러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해 왔다. http://www.ahlamshibli.com
책 소개
‘집’에 대한 고찰
중동과 동아시아, 유럽 등에서 개인전 및 단체전에 참여해 온 팔레스타인 사진가 아흘람 시블리는 1947년 시작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경 분쟁을 겪으며 자신이 소속되었던 곳으로부터 쫓겨나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깊이 이해했다.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의 집계에 따르면 이 분쟁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 약 칠십만 명이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약 오백만 명이 난민촌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를 두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랍어로 ‘재앙’을 뜻하는 ‘알 나크바(al-Nakba)’라고 부르며, 분쟁이 그들에게 근본을 뒤흔든 트라우마로 각인되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근원적 소속으로부터의 이산 경험은 그의 작업에 ‘집’이라는 주제를 불러들였다.
시블리에게 집은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주거지로서의 의미를 넘어 상실의 경험이 녹아든 모든 소속을 뜻한다. 이스라엘 국가 주도 하에 이뤄진 추방과 소수민족(베두인)의 억압을 다룬 ‘고테르’(pp.30–37), 이차대전 이후 살던 곳에서 쫓겨난 독일인들과 독일에 사는 이주노동자들의 각기 다른 운명을 담은 ‘하이마트’(pp.132–139), 보육 시설에서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돔 지에츠카. 당신이 없을 때 집은 굶주린다’(pp.80–89) 등 제각각 다른 장소에서 촬영된 사진들은 그 배경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의 집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군대에 자원한 팔레스타인 베두인족 후손들을 담은 ‘추적자’(pp.38–47)에서 두드러지듯이, 그의 작업에서 디아스포라 경험은 단순히 물질적 공간으로서의 집(국가)뿐만 아니라 분쟁으로부터 비롯된 정체성의 혼란과 변화 또한 포함한다.
한편 런던, 텔아비브 등 여러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스턴 엘지비티’(pp.54–59)에서의 집은 다름 아닌 ‘몸’으로,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성(性)의 몸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 그 자체이다. 이때 그동안 상실된 공간으로서 다시 되찾고자 분투했던 집은, 반대로 개인에게 부과하는 억압과 그 속에 은밀하게 내재된 정체성의 정치가 지닌 한계와 제약을 드러낸다.
전체를 조망하는 긴 시선
아흘람 시블리는 시리즈의 형태로 작업을 선보이는데, 한 장면의 강렬한 인상에 의존하는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예를 들어 ‘인정받지 못하는’(pp.22–29)은 아랍 알나임 마을의 전경을 담은 사진(pp.24–25)으로 출발해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서서히 보여준다. 전경 사진 속 마치 마을의 일부처럼 멀리서 포착된 여자, 바위 사이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pp.26–27),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담아낸 어린 형제(p.29 아래)의 모습…. 정해진 좌표 없이 조합된 사진들은 극심한 상황 속에서도 다정하고 단순한 마을의 일상을 드러낸다. 아담 심치크는 작가론 「관계 바로잡기: 아흘람 시블리의 작업에서 주목하는 배척된 사람들」에서 “시블리는 몽타주 기법을 사용해 일상에서 서사적인 차원을 이끌어낸다”고 설명한다.
심치크가 이야기한 몽타주 기법은 그가 2017년 「도큐멘타 14」에서 큐레이팅한 시블리의 작업 ‘하이마트’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데, 시블리는 유민 모두의 공통된 고통에 주목한다. 나치의 패배 이후 쫓겨난 독일계 후손들과 지중해 지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각각 이주의 시기와 이유는 다르지만 이산 체험을 주제로 한 곳에 겹쳐진다. 더 나아가 ‘응시’(pp.140–145)는 새로 촬영한 사진이 아닌, 기존의 ‘점거’(pp.120–131)와 ‘하이마트’ 중에서 다시 선택된 사진들을 조합한 시리즈로, 완전히 동떨어진 듯 보이는 상황에서 무엇이 비슷하고 다른지 탐구한다. 잃어버린 땅과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주제 아래 세계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시블리의 이같은 영화적 작법은 개별 사진들을 여러 맥락에서 다시 보게 하는 동시에 하나로 묶는다.
또한 그는 사진과 글을 함께 엮어 작품을 구성하는데, 이미지와 텍스트를 조합하는 방식은 1930년대 이래로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 예술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 왔다. 주민들이 쫓겨난 폐허를 보여주는 ‘아홉 권에 담은 와디 살리브’(pp.18–21)에서 시블리는 “내게는 그 폐허가 인간의, 사적인 사건들의 목격자로 보였다”고 말하며 지난 작업을 회고한다. 이어서 그는 다음의 문장들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나는 현재에서 과거를 보고 추적하고 연결했다. 어두운 공간에 빛을 들여 관심의 대상이 되도록 하고 무대로 만들었다. 나는 빛을 흩뿌려 잠든 영웅들을 깨웠다.” 그런가 하면 ‘골짜기’(pp.74–79)의 글은 좀더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구성되었다. 시블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국경 지역에 위치한 마을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사진이 촬영된 시기 이전에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담은 편지의 내용을 함께 전한다. 사진을 통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마을의 모습과 과거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편지가 합쳐져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된다. 후기로 갈수록 개별 사진에까지 장소, 시간, 상황, 사람들을 기록한 긴 글이 덧붙여지는데, 이는 산투 모포켕과 데이비드 골드블라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변화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시리즈의 형태, 글과 사진을 조합하는 그의 독특한 작업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약탈의 현장에 집중하면서도 점거된 이후의 현실이 어떻게 남고 또 복원되는지 끝까지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열린 시각에서, 열정적인 동시에 객관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담아내는 그만의 시선이다.
숨은 자들의 사진가
“아흘람 시블리는 숨은 자들의 사진가이다. 그녀는 숨어 있는 증거, 흔적, 장소, 사람들을 찍는다. 물론 팔레스타인 사람으로서 시블리는 숨겨진 것과 숨은 자의 편이며, 그들과 함께 숨은 채로 산다.” —존 버거
아흘람 시블리는 언제나 주요 세계보다는 그 아래 숨어 있는 하위 세계에 살고 있는 피지배층, 즉 ‘숨은 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작가론에 인용된 존 버거의 글 「유랑인의 조심스러움(A Nomadic Discretion)」에서의 표현처럼, 시블리는 ‘숨은 자들의 사진가’다. 심지어는 표면적으로 피해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게도 그는 관심을 쏟는데, 그 예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정찰병들을 담은 ‘추적자’가 있다. 역시 존 버거가 시블리의 사진집 『추적자(Trackers)』(2007)에 쓴 글 「이들은 무엇을 지니고 다니는 걸까?(What are they Carrying?)」 (이 글은 존 버거의 『모든것을 소중히 하라』와 『사진의 이해』에도 수록되어 있다)에서 주목한 바 있듯, 이 시리즈에서 시블리는 정찰병들을 단순히 배신자로 비난하기보다 그들이 그 선택을 하게 된 까닭과 그에 따른 대가에 대해 탐구한다. 사진 속 정찰병들의 집과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추적하며 시블리는 권력자들의 전유물인 단순화, 일반화를 거부하는 몸짓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시블리가 이토록 집요하게 숨은 자들, 배척된 사람들에게 주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그 스스로 팔레스타인 사람, 베두인이라는 정체성의 이유도 분명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피해자로 그려지는 사람들에게 존엄을 돌려주기 위함이다. 그는 숨은 자들의 복잡한 상황을 이해한다.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점거를 다룬 ‘점거’에서처럼 그는 침범, 약탈 등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포착해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만든 울타리가 정착민 스스로에게도 감옥 같은 공간을 만드는 아이러니, 이스라엘 점령군이 설치해 둔 창살과 그물망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는 전도의 흔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면화되는 통제들이 얽혀 모두 그의 피사체가 된다. 그밖에 다른 방법이 남아 있지 않을 때 그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움직임, 다시 말해 ‘숨는 행위’의 다양함과 차이를 시블리는 알고 있다.
작가 소개
아흘람 시블리(Ahlam Shibli, 1970– )는 팔레스타인의 사진가로, 다큐멘터리 미학을 지닌 그의 사진 작업은 ‘집’이라는 개념의 상반된 함의를 드러낸다. 집의 상실과 이에 맞선 싸움을 다루는 한편, 억압적인 정체성의 정치가 개인과 공동체에 부과하는 집 개념의 한계와 제약도 다룬다. 국제적으로 여러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해 왔다. http://www.ahlamshibli.com